친일 숭미 귀태정권의 발악

[스크랩] 10월26일 오늘은 이토오히로부미와 박정희가 총맞은 날입니다

김 영철 2007. 11. 11. 17:18

아직도 대한민국 군대는 식민지 군대에 불과한가?
파병연장=노무현=이명박/파병연장반대=정동영.문국현.권영길

국익이란 이름으로 미국식민지군대가 되어 힘없는 나라의 가슴에 총부리을 겨누지말라!!파병연장입장만 보아도 이명박이나 노무현은 결국 미국의 충실한 개들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수 있다.대선후보들 중 정동영과 문국현과 권영길은 파병연장반대입장인데,만약대통령당선후에 미국의 압력에 당당히 거부할 수 있는가가 문제다! 8.15이후 조선총동부의 깃발이 일장기에서 성조기로 바뀐이후 미국의 손아귀에서 놀아난 대한민국이 얼마나 당당히 자주적인 주권국가로 행세해 왔던가!!당당한 자주독립국가의 실현을 고대해 본다.남북통일전까지는 아직도 대한민국은 완전한 자주독립국가라고 볼수가 없다!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 역에서 이토가 코코프체프와 열차에서

회담을 마친 뒤 러시아 의장대를 사열하고 환영군중 쪽으로

가는 순간 권총을 쏘아, 이토에게 3발을 명중시켰다.

 

 

동포에게 고함

 

대한제국의군참모중장   안  중  근

 

   

  내가 한국독립을 회복하고 동양평화를 유지하기 위하여 삼년동안을 해외에서 풍찬노숙하다가 마침내 그 목적을 도달치 못하고 이곳에서 죽노니 우리들 이천만 형제자매는 각각 스스로 분발하여 학문을 힘쓰고 실업을 진흥하며 나의 끼친 뜻을 이어 자유독립을 회복하면 유한이 없겠노라.

 

대한제국의군 참모중장 안 중 근

 

 

 

이완용 등 사대매국주의자들을 앞세워 조선을 침략하여 쥐나대륙을 공격하는 발판으로 삼은 일본제국주의의 원흉인 이토로히로부미 심장에 총탄을 겨둔 안중근 장군의 동양평화론은 상호침략과 독점이 아니라,상호 협력과 공존을 통하여 서양제국주의의 침략을 차단하고 동아시아가 평화을 유지하자는 것이다.이러한 안중근 장군의 동양평화론은 평화애호민족으로서 한민족이 적극적으로 주도하여 21세기 동아시아 평화공존체제로 발전시켜야 한다.

 

 

그러기위해서는 일본은 일제하 아시아침략에 대한 공개사죄와 함께 피해보상,그리고 한중일 역사정립,한반도평화와 한반도통일에 적극 동의및 협력,상호존중을 전제로하는 정치경제간 평화협력관계가 실현되야 할 것이다.안중근장군은 카톨릭인이였다.종교을 떠나서 민족을 생각하는 종교야말로 민족적으로도 존재의미가 있다.생명윤리법으로 황우석매장하려는 카톨릭집단의 행위는 애국자 안중근을 매장하려는 행위와 다를바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태국에서 연구을 하고 있는 황우석박사의 모습은 마치 일제하 일제의 국내탄압을 피하여 만주와 쥐나대륙이나 러시아지역에서 독립운동을 하는 거나 무엇이 다르겠는가??현재 대한민국의 국정을 책임지고 있는 노무현정부의 실체가 의심스러운 대목이 아닐수 없는 것이다.한덕수 국무총리의 경우 국익과 실용화차원에서 이중국적을 인정하는 것을 법으로 개정하자고 한다.그러한 국정행위가 모두 한반도의 미국화을 추진하기위한 사대주의적인 정치행위가 아니겠는가?대한민국의 정체성상실과 자주성상실의 배경과 관련하여 8.15이후 조선총독부의 깃발이 일장기에서 성조기로 바뀐이후 대한민국이 과연 실질적으로 얼마나 자주적인 주권국가을 유지해 왔던가?따라서 일단은 상호존중과 상호합의와 합의실현을 전제로 우리민족끼리의 자주적이고 평화적인 통일이 가장 급선무적인 사명이라 할 것입니다[윤복현]

 

 

안중근(安重根, 1879년 9월 2일 - 1910년 3월 26일)은 대한제국의 독립운동가, 교육가이다. 1905년 조선을 사실상 일본의 식민지로 만든 을사조약이 체결된 것에 저항해, 독립 운동에 투신한 그는 1909년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했다.어려서 안응칠(安應七)이라는 아명으로 불렸으며,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던 그의 세례명사도 성 토마스의 이름을 딴 토마스였다.그래서 '안중근 토마스'라고도 불린다.

 

생애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났고, 1895년 로마 가톨릭 계열 학교에 입학하여 신학프랑스어를 배웠다. 1904년 평양에서 석탄 장사를 하다가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는 것을 보고 삼흥학교를 세우고 돈의학교를 인수해 교육에 힘쓰다가 1907년 연해주로 건너가 게릴라에 가담하였다. 1909년 이토 히로부미러시아의 재무상 코코브쵸프와 회담하기 위해 하얼빈에 오게 된 것을 기회로 삼아,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권총으로 사살하였다. 곧바로 체포되어 일본 정부에 넘겨져 뤼순 감옥에 갇혔다가 1910년 처형되었으며, 유해는 찾지 못했다.그래서 현재 역사학자들에 의해 안중근 의사의 유해를 찾고자 하는 노력이 진행 중이며, 일부 역사학자들은 대한민국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간의 협력으로 유해 발굴 운동을 해야 한다는 의견을 주장한다.

 


한편 안중근은 글씨가 뛰어나, 뤼순감옥 수감시 많은 유묵을 남겼고 보물 569호로 지정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에 추서되었다.옥중에서 미완으로 끝난 저서《동양평화론(東洋平和論)》을 남겼다.

 

 

 

[보도자료]

 

 

日,동양침략원흉 '이또추모우표' 발행해

중근 장군 기념관서 적괴사살 의거 98주년 추모기념행사
 
리복재 기자
 
▲  안중근 장군 기념 단체가 공개한 엽서 사진 
98년 전인 26일 동양 침략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중국 하얼빈역에서 사살하고 순국한 안중근 장군의 의거를 기념하고 추모하기 위하여 서울과학교육원에서 행사가 열렸다.

또한 이날 기념일에 맞춰 중국 하얼빈(哈爾濱)역에서 안중근 장군에 의해 숨진 조선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추모하기 위해 일본에서 발행한 엽서가 공개돼 눈길을 끌었다.

안중근 기념 단체는 의거 98주년에 맞춰 공개한 엽서는 일본 우정국이 1910년대 발행한 것으로, 이 엽서에는 하얼빈역 구내의 전경과 함께 이토의 암살을 ‘조난’ (遭難)이라고 표기하고 다섯 명의 남자가 역 플랫폼에 서서 이토 히로부미의 피살지점을 표시하고 있다.

이는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동양 침략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에게 조난이라고 쓴 것은 추모하기 위한 명백한 증거이며, 침략을 미화하기 위하여 엽서를 발행했다는 것은 일본이 얼마나 천인공노할 행위를 했는지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안중근 청년아카데미’ 등 단체는  '안중근의거98주년기념전국웅변대회'를 개최하였고, 특별사진전시회(11월1부터 3일까지 한양대), 기념음악회(11월2일, 서초문화예술회관) 등 다양한 추모행사를 갖고 안중근 장군의 독립정신을 고취시켜 나갈 예정이다.

본지가 ‘의사’가 아닌 ‘장군’으로 호칭한 것은 안 장군이 원하지 않았고 당연히 이순신 장군처럼 ‘장군’으로 예를 갖추는 것이 타당하기 때문이다. 

당시 적 괴수인 이또를 사살하고 잡혔을때도 안 장군은 대한제국 육군 참모중장 직위를 밝혔고, 지휘명령체계 확보, 전술적 작전계획수립, 집행 등 분명한 군사작전이었다.
 
또한 안 장군은 국제법상 포로로 대우해줄 것을 요구하였으며, 이또의 사살이 군사작전임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이 그 증거이다.

그런데도 아직까지 ‘의사’로 쓰고 있는 것은 아직도 친일행위자 청산과 과거사 정리가 제대로 되지 않고 있다는 것과, 일본이 안중근 장군을 전쟁포로에서 테러리스트로 전락시키고자 하는 명백한 이유는, 차후 세계사적인 개념에서 침략자를 사살한 것인데도 마치 테러리스트로 개념을 정리하여 격하시키려는 의도이다.

즉, 일본이 주장하는 방식을 그대로 따라했던 친일사학자들과 정권의 친일자들에 의한 정책의 일환으로 나라를 잃은 치욕스러운 '경술국치'를 한국과 일본이 원해서 합쳤다는 개념을 지닌 '한일합방' 등으로 기재하고 말하지 않았던가. 또 일제강점기 때 광개토태왕 비문을 훼손해 마치 한반도 남부를 일본이 지배(임라일본부)했다라고 왜곡하려는 의도나 마찬가지이다.


2007/10/26 [12:12] ⓒ plus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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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동양평화론 21세기 공존 틀로”


  관련기사

  • 안의사 의거 당시 친일세력 “천황에 사죄” 망동

  • 26일 순국 95돌 재조명 박차

    안중근 의사를 21세기 동아시아 평화공존의 사상적 준거로 삼자는 움직임이 본격화하고 있다. 단순히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인물이 아니라, 동양평화에 바탕을 두고 한국, 일본 나아가 동북아를 아우를 ‘통합과 연대’의 길을 제시한 인물로 새롭게 조명하자는 것이다. 안 의사가 옥중에서 쓴 동양평화론을 바탕으로 한 동북아 협력 구상은 현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동북아 중심국 목표의 사상적 뿌리로 평가받고 있다. 또 정부가 중국 뤼순(여순) 감옥 뒤 어딘가에 묻혀 있을 안 의사의 유해 발굴과 송환에 적극적으로 나서겠다는 의지를 밝히면서, 이를 위한 남북 협력 또한 기대된다.

    안중근 의사 기념사업회(회장 함세웅)와 사단법인 기쁨과 희망 사목연구원은 25일 서울 중구 언론회관에서 안 의사 순국 95주년 국제학술대회를 열어 안 의사 의거에 대한 재해석을 꾀했다. 윤병석 인하대 명예교수는 기조발표에서 “그의 독립사상과 동양평화론의 뼈대는 한국·중국·일본 세 나라가 각기 서로 침략하지 말고 독립을 견지하면서 단결하자는 것”이라고 풀이했다. 윤 교수는 특히 안 의사가 △중국 뤼순을 동양평화의 근거지로 만들고 △한·중·일 공동의 군대를 편성하며 △한·중·일이 동양평화회의를 창설하고 △한·중·일 공동은행을 만들어 공용화폐를 발행하고 △동아시아 곳곳에 동양평화회의 지부와 공동은행 지점을 설치하자고 구상·제안했던 것을 지적했다. 최근 정치권과 학계 등에서 논의하고 있는 ‘동아시아 공동체’를 안 의사가 이미 1세기 전에 주창했다는 것이다.

    기념사업회등 학술행사·추모사업
    유해발굴·송환 남북 공동협력 추진

    김영호 유한대 학장은 안 의사가 세워놓은 “동북아 각국의 독립과 주체적 참여를 전제로 한 국제 평화주의의 틀”을 ‘안중근 플랜’으로 부를 것을 제안한 바 있다. 한상권 덕성여대 교수의 조사 결과를 보면, 지금까지 안 의사와 관련된 어린이용 위인전만 약 130권에 이르고 여러 편의 영화와 드라마가 만들어졌지만 그 대부분은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사실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이날 학술대회는 안 의사 의거 100주기가 되는 2009년을 염두에 둔 대규모 재조명 작업의 첫걸음이다. 윤원일 안중근 의사 기념사업회 사무총장은 “안 의사는 공화정과 인권·평등을 주창한 ‘민주화 1세대’”라며 “시민의 인권과 평등을 존중하는 나라가 서로 자존과 독립을 유지하며 지역 평화를 이루자는 안 의사의 선구자적인 사상을 한국은 물론 동아시아 및 전세계에 확산시킬 계획”이라고 밝혔다. 기념사업회는 앞으로 의거일인 10월26일을 ‘안중근 의사의 날’로 정부가 지정하도록 촉구하는 한편, △안 의사 일생을 조망하는 방송 특집 드라마 및 창작 뮤지컬 제작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중국·러시아 등 거사 현지 답사캠프 △한·중·러 합작 다큐멘터리 제작 △국제평화 포럼 △대한국인 사이버 동의단지회 창립 등을 추진할 예정이다.

    이런 평가작업과 함께 정부는 95년째 중국 뤼순감옥 인근에 묻혀 있는 안 의사의 유해를 찾아서 발굴하는 작업을 광복 60돌 남북 공동사업으로 정했으며, 이를 위한 준비를 진행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동안 남북 모두 수십 차례에 걸쳐 시도된 유해 발굴 작업은 모두 실패로 끝났으나 지난해 말 이래 유해 발굴을 위한 조사작업이 활기를 띠고 있다. 새로운 자료에 근거해 감옥 뒷동산의 위치와 크기, 안 의사가 묻힌 대강의 위치 등을 바탕으로 묘지가 ‘북위 38도49분3초, 동경 121도15분43초’께에 있는 것으로 잠정 결론을 내렸기 때문이다.

    한편, 안중근 의사 순국 95주기 추도식이 26일 오전 10시 서울 남산의 안중근 의사 기념관 앞 서울특별시 교육연구원 강당에서 쓰노다 기이치 참의원 의원 등 일본 쪽 추모단 40여명이 함께 참석한 가운데 열린다. 강태호 안수찬 기자 kankan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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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립운동가 50인의 초상화

    러시아 작가-세르게이 예브게니예프 토고레프
    모스코바 부기끄 영화대학 영화미술교수가 그린 초상화

     

     

    * 인물들 중 친일파로 변절한 서재필과 미국에게 통치을 맡기자던

    숭미사대주의자 이승만은 제외시켰습니다.자주주권회복과는 거리가 멀고 오로지 자신의 안위을 위해 대세를 따라가려는 변절자들은 기회주의자들로 역사에 기록될 뿐입니다



     

     

       고종황제(1852-1919)
    조선 제26대왕

     

     (?)
    (명성황후의 초상화를 그린것 같음)

         구연영(1864-1907)
    항일애국지사, 이천수창의소 결성

       구정서(1882-1907)
    항일애국지사

       김 구(1876-1949)
    독립운동가, 대한민국임시정부 수석

     김 혁(1875-1939)
    독립운동가, 성동사관학교 설립

     김학규(1900-1967)
    독립운동가

       박준채(1914-2001)
    광주학생독립운동

       김좌진(1889-1930)
    독립운동가, 북로군정서 총사령

        김지섭(1884-1928)
    독립운동가, 의열단

      김창숙(1879-1962)
    독립운동가, 교육가

      김상옥(1890-1923)
    독립운동가, 종로경찰서 폭파

       남자현(1872-1933)
    여성독립운동가, 여자교육회 설립

       노백린(1873-1926)
    독립운동가, 임시정부 군무총장

      김동삼(1878-1937)
    독립운동가

      박은식(1859-1925)
    독립운동가, 민족사학자

      민영환(1861-1905)
    독립운동가, 순국지사

      박재혁(1895-1921)
    독립운동가, 의열단

       백정기(1896-1934)
    독립운동가, 흑색공포단조직

      손병희(1861-1922)
    독립운동가, 천도교지도자(제3대 교주)

     송학선(1893-1927)
    독립운동가

     (?)

     (?)

     안중근(1878-1910)
    독립운동가, 이등방문 저격

       한용운(1879-1944)
    독립운동가, 승려, 시인

     편강렬(1892-1928)
    독립운동가, 의성단 조직

       한 징(1886-1944)
    독립운동가, 국어학자

      전명운(?-?)
    독립운동가, 공립협회 활동 

       장인환(1876-1930)
    독립운동가, 시티븐스 주살

       신채호(1880-1936)
    독립운동가, 민족사학자

      이종일(1858-1925)
    독립운동가

       이재명(1890-1910)
    독립운동가, 공립협회 활동

       이윤재(1888-1943)
    독립운동가, 국어학자

      이시영(1869-1953)
    독립운동가, 대한민국 정부 초대 부통령

     이시영(1882-1919)
    독립운동가, 조선국권회복단 활동

       이명하(1878-1920)
    독립운동가

     이상설(1870-1917)
    독립운동가, 권업회 활동

       이봉창(1900-1932)
    독립운동가, 한인애국단 활동

      이범진(1852-1911)
    항일애국지사, 초대 러시아 공사

      이범석(1900-1972)
    독립운동가

      이동녕(1869-1940)
    독립운동가, 신흥무관학교 설립 

       이 준(1858-1907)
    항일애국지사, 비밀결사 개혁당

      윤봉길(1908-1932)
    독립운동가

      유관순(1902-1920)
    독립운동가

      양기탁(1871-1938)
    독립운동가, 언론인

      안희제(1885-1943)
    독립운동가, 대동청년단 조직

       안창호(1878-1938)
    독립운동가, 임시정부 내무총장

      이회영(1867-1932)
    독립운동가 

     


     박정희에 대한 냉정한 역사적 평가
     
    박정희는 혈서로 천황에게 충성을 바치겠다고 맹세한 만주군관학교와 일본육사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독립군 토벌에 나선 친일장교출신으로 8.15이후 좌익에 참여하여 여순반란사건에 가담하다 사형직전에 살아나 결국 소장시절 쿠테타로 권력을 잡고 장면정부때 김구선생의 비서출신이자 독립군출신인 장준하선생이 기획한 [경제개발계획]을 실행에 옮기게 되었고 결국 장기독재로 측근간에 암투까지 벌어져 총맞아 죽게 되었던 거지요..욕심이 과하면 결국 독이 된다는 것을 증명했습니다.친일장교 출신의 박정희는 민족정기회복차원에서도 국립묘지에 안장되서는 안되며,박근혜씨 등 가족들이 좋은 곳으로 안장하도록 하되, 대통령으로서 경제개발계획을 실행에 옮겨 대한민국 경제발전의 토대을 이룬 업적은 역사적으로 높이 평가받고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윤복현].
     

     

     

    10·26 사건


    10·26 사건1979년 10월 26일, 대한민국중앙정보부 부장이던 김재규박선호, 박흥주 등과 당시 대통령 박정희와 대통령 경호실장 차지철 등을 살해한 사건이다. 김재규는 재판 과정에서 민주화에 대한 열망으로 대통령을 살해했다고 주장했으나, 권력간 암투에서 당시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리던 차지철에 밀리는 상황에서 충동적으로 일으킨 범행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다.


    사건 관련자 명단

    [편집] 현장에 있던 당사자들



    • 박정희-대한민국 대통령,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게 머리와 가슴을 맞고 죽음.
    • 차지철-대통령 경호실장,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게 팔과 배를 맞고, 경비원 김태원에게 확인사살당함.
    • 김재규-중앙정보부장, 대통령 박정희와 대통령 경호실장 차지철을 안가 연회장에서 죽임.
    • 김계원-대통령 비서실장, 사건 목격자.
    • 심수봉-유명 신인가수, 사건 목격자.
    • 신재순-한양대학교 연극영화학과 3학년의 대학생, 사건 목격자.

    [편집] 사건 가담자들



    • 김재규-중앙정보부장-1980년 5월 24일 교수형
    • 박흥주-중앙정보부장 수행비서, 육군 대령-1980년 3월 6일 총살형
    • 박선호-중앙정보부 의전과장, 중학교 시절 김재규의 제자-1980년 5월 24일 교수형
    • 유성옥-궁정동 안가 운전기사-1980년 5월 24일 교수형
    • 이기주-궁정동 안가 경비과장-1980년 5월 24일 교수형
    • 김태원-궁정동 안가 경비원-1980년 5월 24일 교수형
    • 서영준-궁정동 안가 경비원-징역형 뒤에 석방됨

    이들 중 서영준만 제외하고 나머지는 모두 사형 선고를 받아 1980년에 처형됨.

    [편집] 간접 당사자들



    [편집] 사망자



    • 박정희-대한민국 대통령,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게 머리와 가슴을 맞고 죽음.
    • 차지철-대통령 경호실장,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게 팔과 배를 맞고, 경비원 김태원에게 확인사살당함.
    • 정인형-대통령 경호처장, 중앙정보부 의전과장 박선호에게 가슴을 맞고 죽음.
    • 안재송-대통령 경호부처장, 중앙정보부 의전과장 박선호에게 가슴을 맞고 죽음.
    • 김용섭-대통령 경호원, 별관 식당에서 안가 경비원들과 박흥주에 의해 죽음.
    • 김용태-대통령 운전기사, 별관 식당에서 안가 경비원들과 박흥주에 의해 죽음.

    [편집] 생존자



    • 김계원-대통령 비서실장, 사건 목격자.
    • 박상범-대통령 경호실 수행계장.
    • 심수봉-유명 신인가수, 사건 목격자.
    • 신재순-한양대학교 연극영화학과 3학년의 대학생, 사건 목격자.

    [편집] 사건의 개요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는 1979년 10월 26일에 박정희 대통령과 함께 삽교천 방조제 준공식과, 당진에 있는 중앙정보부 시설에 가려 했다. 그러나 '권력의 제2인자'라 불리던 대통령 경호실장 차지철김재규를 일방적으로 제외시켰고, 그 결과 방조제 준공식은 김재규가 없는 상황에서 진행되었다.

    박정희가 준공식에서 돌아오자, 차지철은 다시 김재규에게 전화를 걸어 오후 6시에 궁정동 안가로 오라는 대통령의 명령을 전한다.

    [편집] 사건의 진행


    김재규는 사전에 을 자신의 바지주머니에 숨기고 박정희와 대면했다. 그리고 대통령 비서실장 김계원에게 박정희차지철을 죽일 것이라고 알렸다. 박정희차지철이 궁정동 안가로 들어오고, 김계원과 김재규도 연회장이 있는 '나'동으로 들어갔다.

    그 시간에 중앙정보부 의전과장 박선호는 호텔에서 데리고 온 심수봉과 신재순에게 보안서약서를 쓰게 했다.

    박정희김재규에게 여러가지로 민중들의 데모에 관해서 물었고, 차지철이 어정쩡하게 대처한다고 말했다. 궁정동 안가에 오자마자 전화로 들어오라고 한 정승화와 김정섭이 있는 '가'동으로 들어가 그들에게 양해를 구했다. 그 때가 저녁 7시 10분경이었다.

    다시 연회장에 가고 문 앞에서 총 체크를 하는 순간에, 차지철이 나타났다. 김재규는 총을 도로 바지주머니에 집어넣었고, 차지철은 그냥 지나갔다. 차지철은 경호원들이 있는 주방으로 내려가봤고, 연회장에 들어오는 때에, 심수봉이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다시 차지철이 들어오자, 김재규는 다시 나가 박흥주와 박선호를 불러 이렇게 말했다.


    "나는 각하(박정희)와 차지철을 죽일 것이다. 박선호 너는 정인형(대통령 경호처장)과 안재송(대통령 경호부처장)을 처단하고, 박 대령(박흥주)은 경비원들과 함께 주방의 경호원을 모두 없애라. 이것은 혁명이다!"

    그 때가 저녁 7시 30분이었다. 다시 돌아와보고 나니, 시간이 저녁 7시 38분이었다. 심수봉의 노래가 끝나자, 이번엔 신재순이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편집] 사건 순간


    1979년 10월 26일 금요일 저녁 7시 41분, 신재순이 노래를 부르고 있는 중간에, 김재규박정희에게 해서는 안될 말을 내뱉는다.


    "각하, 이 따위 버러지 같은 놈(차지철)을 데리고 정치를 하니, 정치가 올바로 되겠습니까?"

    순간 김재규가 "너 이 새끼 차지철, 아주 건방져! 죽일 놈!" 이라고 말하자 총알은 차지철의 팔에 맞았다.

    박정희가 "무슨 짓이야? 김부장!"이라고 호통치자 김재규박정희의 가슴을 향해 총을 쐈다. 그 총소리가 들리는 순간, 박선호는 안재송과 정인형을 차례로 대기실에서 총을 쏴 죽였으며, 박흥주 역시 경비원들과 같이 주방에 있던 경호원들을 죽여버렸다.

    김재규가 총구를 차지철 쪽에 조준했고, 차지철은 계속 김재규에게 저항하는데, 김재규가 총을 쏘려고 방아쇠를 당겼지만, 총이 작동이 되지 않았다. 그 때, 정전이 되었으며, 김재규는 연회장을 빠져나가 1층 로비로 갔다. 두리번거리고 있을 때, 박선호가 나타났고, 김재규는 총을 박선호의 총과 맞바꿨다.

    박선호는 탐색하러 갔고, 김재규는 연회장으로 다시 들어갔는데, 그 때는 심수봉과 신재순이 박정희를 부축하고 있었다. 차지철은 화장실에 숨었다가 다시 나왔고, 경호원을 찾으러 나가려는 순간에, 다시 김재규가 들어와 있었다. 차지철김재규에게 장을 던져 총을 쏘는 것을 막으려 했지만, 김재규는 피하고 차지철의 배를 향해 총을 쐈다. 차지철은 그대로 엎어졌다. 김재규는 박정희 앞으로 다가와 총을 겨누었고, 심수봉과 신재순은 도망가 어디론가로 숨었다. 김재규는 그들이 도망가고, 총구를 박정희의 머리에 겨누더니, 이내 방아쇠를 당겼다. 그러나 박정희의 사인은 머리에 총을 맞은 것이 아니라, 가슴에 맞은 거였으며, 머리에 맞기 전에 이미 사망했다.

    김계원은 연회장의 대기실에서 사건을 지켜봤다. 정승화와 김정섭도 20여발의 총소리에 조금 의아하게 여겼다.

    김재규는 나가서 정승화와 김정섭과 같이 차를 타고 육군본부로 갔으며, 김계원박정희의 시체와 같이 국군 서울지구병원으로 가서 박정희를 살려내기위해 몸부림쳤다.

    그러나 김계원은 청와대로 들어오자마자, 국무총리 최규하에게 박정희의 저격범은 김재규라고 말했고, 최규하를 모시고 육군본부로 가 정승화와 국방부 장관 노재현을 만나 범인은 김재규라고 다시 말했다.

    궁정동 안가에서는 경비과장 이기주가 박선호의 명령을 받고, 경비원 김태원을 시켜 쓰러져있는 사람 모두를 확인사살시킨다. 꿈틀거리던 차지철도 이렇게 죽어버렸다.

    [편집] 김재규의 체포와 사형집행


    한편, 정승화는 육군본부 헌병감 김진기에게 김재규에 대한 체포 명령을 내렸고, 27일 오전 0시 40분 김진기가 김재규를 체포하자, 정승화는 보안사령관 전두환을 불러 이를 보안사령부에서 인계받아 김재규를 철저히 조사하라고 지시하였다.

    이후 김재규는 남영동에 있던 보안사령부 소속 서빙고 분실에서 가혹한 고문과 수사를 받았으며, 군법재판에서 내란목적살인이라는 죄목으로 사형 선고를 받아, 1980년 5월 24일 당시에 서울 서대문에 위치하던 서울 구치소에서 교수형을 당했다.

    [편집] 사건의 의의


    이 사건은 특종이었다. 최고권력자인 대통령이 자신의 충복인 중앙정보부장에게 살해됐다는 그 자체가 놀라웠다. 김재규는 재판정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쐈습니다. 나는 민주회복을 위해 그리 한 것이었고, 이 땅의 자유민주주의를 위해 그리 한 것이었습니다. 아무 뜻도 없었습니다."

    여기서 경호원들 모두(서영준 제외) 사람을 죽였으나, 그들은 상관인 김재규의 명령을 받았다. 하지만 이것은 군사법원에서 주관했기에 관대한 처분을 받기란 사실상 어려웠으며, 상관의 명령 하나로 대통령을 죽인 공범이 되어 사형당하였다. 지금도 10.26사건에 대한 논란은 여전히 일고 있다.

    [편집] 같이 보기


    출처 : 민족반역자처단협회
    글쓴이 : 윤복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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