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사오적은 이완용, 이근택, 이지용, 박제순, 권중현이고, 정미칠적은 이완용, 송병준, 이병무, 고영희, 조중응, 이재곤, 임선준이고, 경술국적은 이완용, 윤덕영, 민병석, 고영희, 박제순, 조중응, 이병무, 조민희이다. 따라서 3관왕은 이완용 혼자이고, 2관왕은 박제순, 고영희, 조중응 세 사람이다. 경술국치 당시 최연장자는 고영희이다.
1909년 2월 4일, 창덕궁 인정전 앞에서 이토 히로부미와 순종을 위시해서 이들 친일 대신들이 기념촬영을 했다. 그해 1월, 이토 히로부미는 순종과 대신들을 이끌고 평양 신의주까지 서북행을 하고 부산까지 남행을 한 후에 이를 기념하기 위해 이 사진을 찍었다.
사진을 보면 중앙에 이토 히로부미와 순종이 있고, 이토의 좌측으로는 이완용, 이선준, 고영희, 송병준, 박제순, 권중현이 서있고 왼쪽 끝에는 젊은이가 있다. 순종 오른 쪽으로는 이재각, 민병석, 이재곤, 조중응, 김윤식, 이지용, 조민희가 서 있고 오른쪽 끝에 키가 크고 인물이 좋은 젊은이가 서있다. 이토의 바로 뒤에는 윤덕영이 서있다. 윤덕영은 윤비(尹妃)의 큰 아버지로 옥인동에 뽀족당이란 거대한 서양식 주택을 지은 사람으로 유명하다.
앞줄 오른 쪽 끝에 서있는 젊은 관료가 고희성(高羲誠 1876~?)인데, 당시 궁내부 예식과장이었다. 요즘으로 말하면 청와대 총무/의전수석이 될 것인데, 순종의 서북행과 남행을 진두지휘했다. 고희성은 고영희(高永喜 1849~1916)의 둘째 아들로 한성한어학교와 한성영어학교에서 공부해서 중국어 영어 일어에 능통한 수재였다.
앞줄 왼쪽 끝에 서있는 젊은 관료는 고희경(高羲敬 : 1873~1934)이다. 고희경은 고영희의 큰 아들로, 관립 영어학교인 육영공원(育英公院) 1기 졸업생으로 영어와 일본어에 능통했다. 고희경은 진사과에 합격하고 통리기무아문(요즘의 외교부)에서 주사로 있다가 일본 공사관 참사관 등을 지낸 후 1900년에 궁내부 예식원 번역과장을 지냈다. 1902년에는 영국 에드워드 1세 즉위를 축하하기 위한 특사 이재각을 수행해서 도쿄, 뱅쿠버, 뉴욕을 거쳐 런던을 다녀왔다. 캐나다 정부는 이 일행에게 대륙횡단 철도편을 제공했고 이들은 뉴욕에 가기 전에 나이아가라 폭포를 구경했다. 이들은 나이아가라 폭포를 구경한 최초의 한국인이다.
고희경은 1904년 5월 조선에 도착한 이토 히로부미를 영접해서 유창한 일어와 영어로 이토의 호감을 샀다. 1905년 3월, 고희경은 궁내부 예식과장이 되었다. 을사늑약에 다섯 대신들이 서명을 할 때 그는 궁내에 있었다. 1907년 12월, 영친왕 이은이 어린 나이에 일본으로 유학을 떠날 때 동궁대부(東宮大夫)로 임명되어 이은을 모시고(데리고) 도쿄에 도착해서 이은의 일본생활을 총괄했다. (송우혜 선생이 저술한 ‘마지막 황태자’에 고희경에 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고희경은 일본으로 떠나면서 후임 예식과장으로 동생 고희성이 임명되도록 했다. 순종의 서북행과 남행에 이토가 참석하기 때문에 고희경이 일본에서 국내로 들어와서 그 행사에 참가하고 기념사진을 찍은 것이다.
이 사진에 고영희 3부자가 함께 나왔다는 점이 놀랍다. 그것은 고희경 고희성 형제에 대한 이토의 신임이 컸기 때문이다. 을사오적 등 매국노 리스트에 오른 사람 중에는 이 왕가 친인척도 몇이 있고, 무관 출신으로 벼락출세를 해서 대신이 된 사람도 있다. 고영희는 중인(中人) 역관 출신으로 탁지부대신 등 대신 급에 등용된 매우 드문 경우이다. 고희경과 고희성은 탁월한 외국어 실력에 힘입어 이토에 의해 발탁되었다고 하겠다. 1916년에 고영희가 사망한 후 고희경은 부친의 자작 작위를 습작(襲爵)했는데, 1920년에는 영친왕 이은을 방자 여사와 결혼시킨 공로로 승급을 해서 백작이 됐다. 경술국치 후 친일파들에게 수여된 작위를 습작한 후손이 승작(昇爵)한 경우는 고희경이 유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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