쥐구녕에 물 붓기

이명박 해부

김 영철 2009. 6. 28. 20:28

 

이 대통령은 “밤에 일본의 TV 프로그램을 봤더니 이번 쓰나미로 자식을 잃은 아주머니가 나왔더라. TV 리포터가 ‘왜 자식을 잃고도 눈물을 많이 흘리지 않느냐. 왜 목 놓아 울지 않느냐’라고 묻자 이 아주머니는 ‘난 한 명의 자식을 잃었다. 내 주변에 자식을 두 명, 세 명을 잃은 사람도 많다. 내가 너무 슬프게 울면 그런 분들에게 폐가 된다’고 말하더라. 그 이야기를 듣고 난 정말 크게 놀랐다”는 취지로 말했다고 동석했던 참모들이 전했다.(2011.4.11. 중앙일보. (서승욱기자) 기사내용) 

기사-

중국을 방문하고 있는 이명박 대통령은 29일 베이징대 연설에서 "요즘 중국의 젊은이들 사이에는 기업인을 장래 희망으로 꼽는 사람이 많다고 들었다"면서 "하긴 예로부터 장사 잘하기로 말하면 중국사람들이 최고"라고 말했다.
이어 이 대통령은 "나는 대학에 다닐 때 현실비판적인 학생운동을 심하게 했고, 그래서 감옥에 들어가기도 했다"며 당시 학생운동을 한 사람들은 정치인을 지망했지만 저는 기업인의 길을 택했다"고 말했다.
이 대통령은 "내가 입사한 현대그룹은 당시만 해도 100명이 못 되는 중소기업에 불과했지만 27년을 일하고 회사를 떠날 때에는 종업원이 16만 명에 일하는 세계적인 기업집단으로 성장했다"며 "내가 다니던 기업이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진취적인 자세로 한국이라는 울타리를 뛰어넘어 세계 무대에 도전했던 것이 그 밑거름이 되었던 것"이라고 강조했다.
서울시장 재임시절에 대한 언급도 나왔다. 이 대통령은 "나는 서울시장 재직 시에 대도시의 친환경적 발전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며 "그 중 하나가 청계천이라는 하천을 복원하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나를 선택한 건 변화에 대한 욕구"
이어 이 대통령은 "제가 기업을 떠나 정치계로 입문하게 된 것은 사회적 책임에 대한 의식"이라고 강조했다.
또 이 대통령은 지난 대선과정을 언급하면서 "지난 해 12월 대통령 선거에서 나는 우리 대한민국 역사상 최대의 표차로 압승을 거둘 수 있었다"며 "아마 한국의 국민들이 나를 선택한 이유는 바로 '변화에 대한 욕구'였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 대통령은 "대한민국 국민은 낡은 이념이나 정파 정치에 연연하지 않는 새로운 리더십, 국민에게 행복과 희망을 주는 '비전의 리더십'을 원했다"고 강조했다.
 
  이 대통령은 "나는 오늘 이 자리에 한국의 대통령으로서만이 아니라 인생의 한 선배로서 내일의 지도자인 여러분과 가슴을 열고 대화하고자 한다"고 말했다.
이어 이 대통령은 "도전한다고 해서 늘 성공하는 것은 아니며 때로는 실패할 수도 있으나 실패를 두려워 하지 말라"면서 "실패해도 도전하고 또 도전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젊음의 특권"이라고 말했다.
그는 "실패의 좌절을 겪어 본 사람은 인생에 있어 훨씬 큰 자산을 갖게 되며, 실패를 딛고 일어서는 용기가 있을 때 더 큰 성공이 가능하다고 믿는다"면서 "꿈을 추구하는 한 우리는 영원한 청년이다. 베이징 대학은 바로 청년의 대학"이라고 말했다.
 

"중국 아가씨 좋아했는데…중국집안 사위, 중국 대통령 됐을 수도"
한편 이 대통령은 "우리 집사람이 와 있어 말하기는 곤란하지만 제가 여러분과 같은 나이였을 때 외국에서 근무를 했는데 아름다운 중국 아가씨와 알고 지냈던 기억이 난다"고 말해 좌중의 웃음을 유도했다.

이 대통령은 "그 때 참 좋아했었는데, 갑자기 귀국해서 오래 이어지지는 못 했다"며 "만약 내가 그때 조금만 더 있었다면 나는 아마 중국인 집안의 사위가 됐을 것이고, 그렇게 됐다면 아마 중국의 대통령이 됐을 지도 모르겠다"고도 했다.
이날 북경대 연설에서는 행사장인 대강당에 600여 명의 학생들이 몰렸다. 이 대통령은 이날 연설을 마친 뒤 학생들과 함께 사진을 찍고 일일이 악수를 나누기도 했다.

이 대통령은 이날 오후 청도로 이동해 기업시찰 등의 일정을 소화한 뒤 오는 30일에는 쓰촨성 지진 피해지역을 방문해 피해 주민들을 위로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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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시대의 이명박 가족사진을 보시고

연세 90 이 다 되신 어느 한국 할아버지 말씀,

  

    " 옷차림과

      앉은 자세와

      사진 상황을 보면

      이명박의 가족은

      정상적인 한국사람의 집이 아니다 !"

 

    " 저렇게 일본옷을 입는 것은 웬만한 친일파들도 "

    " 저렇게 노골적으로 일본옷을 입지를 않았다 !"

    " 또 어린 자식(이명박)을 저렇게 멀리 앉힌 것으로 봐서는 "

    " 이명박은 분명히 친자식이 아니다 뭔가 이상하고 어색하다 "

    " 아무리 엄한 분위기의 집안도 "

    " 저 정도 어린 나이의 자식은 부모 옆에 끼고 앉히는 것이

    " 그 당시 한국인의 정서이다 "

   

   이 이야기는 모두 사실이다

   이명박의 애비가 일본놈이라는 이야기에 신빙성을 주는 말이다 !!!!

   여러분들도 주위에 일제시대를 겪은,

   조금 유식한 나이많이 드신 어르신이 계시다면

   사진을 보여 드리고 판단해 보시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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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스스로가 밝히는 자신의 국적)
 
그는 기사에서 봤듯이 "내가 만약 중국에 조금만 더 있었다면 나는 아마 중국인 집안의 사위가 됐을 것이고, 그렇게 됐다면 아마도 중국의 대통령이 됐을 지도 모르겠다"라는 말을 한다.   
 
이상하지 않은가?
 
여기서 이명박은 분명 자신이 한국에서 한 경험을 토대로 중국에서 발언을 하고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인식해야 된다!  이해를 돕기 위해 당신이 일본인이라고 하자.  그리고 당신은 일본에서 한국으로 건너왔다  그리고 한국에 있다보니 당신은 한국인과 결혼을 하게 된다.
 
그리고 한국에서 살다보니 당신은 한국의 경제인이 되게 되었고, 그러다가 승승장구해서 대통령으로까지 오르게 된다.  그리고 당신은 대통령이 되어 중국에 갔다고 하자! 그리고 당신은 그사람들 앞에서 연설을 할 기회가 있게 된다. 
 
당신은 갑자기 외국에 잠시 머물렀던 과거가 생각난다.  그리고 과거에 만났던 연인도 생각이 난다.  그리고 말을 내뱉는다.  "우리 집사람이 와 있어 말하기는 곤란하지만 제가 여러분과 같은 나이였을 때 외국에서 근무를 했는데 아름다운 중국 아가씨와 알고 지냈던 기억이 난다. 만약 내가 그때 조금만 더 있었다면 나는 아마 중국인 집안의 사위가 됐을 것이고, 그렇게 됐다면 아마 (내가 외국인으로서 한국에서 한나라의 대통령이 된 경험을 바탕으로 생각해 봤을 때) 중국의 대통령이 됐을 지도 모르겠다."라고 말한 것이다.  여기서 그는 분명  자신은 한국인이 아니다라는 스스로가 품은 속마음을 무의식 중에 사람들 앞에서 고백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만일,  이런 해석으로 이상황을 접근하지 않는다면 MB는 베이징 연설에서  불필요하게 실현 불가능한 가정을 해대며 대중들 앞에서 혼자서 중얼 거리고 헛소리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현실에서의 가정은  자신이 경험한 근거를 바탕으로 가정을 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일본인이라면 한국과 중국은 똑같은 타국의 입장이 될 겁니다.  그런 당신이 한국으로

건너와 한국에서 대통령이 되고 한국(타국)에서 대통령이 된 경험을 바탕으로 그것을  다시 중국(타국)에 가서 가정을 하며 내가 중국에 있었더라면 중국의 태통령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라는 말을 한다면 그것은 전혀 이상할 것이 없는 완벽한 가정이 될 것입니다. 안그렇습니까?

 

그동안 이명박은 일본에서 태어나 자랐다라는 이유만으로 그를 일본인으로 보는 시각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분명히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명박 그는 정말로 한국인이 아닌 것이 맞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분명한것은 MB 자신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는 겁니다.  

 

 

[참고]"농담 한번 한거 가지고 넘 비약하는 거 아니냐?"라는 분들에게<=주로 한나라당 지지자들이 이런말 잘하더군요.  그의 국가관이 대한민국에 있다면 다른 나라에 가서 저런 농담 못하죠. 오히려 허접한 농담 한번 던지다가 자신의 실체만 들켰을 뿐입니다.  우리나라 안보를 맡고 있는 국방장관이 북한에 가서 내가 여기 머물렀으면 북한의 국방장관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다라고 말한다면 그 심각성을 인식하겠는지요? 그런 말을 하는 국방장관을 믿고 대한민국의 안보를 맡길 수 있을까요? 하물며 대통령은 말할 필요도 없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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쥐박이 4촌 형수의 집을 사실상 '생가'로 홍보
◆포항 덕실마을, '관광지로 개발'

덕실마을은 따로 관리인이 없다. 주민들이 현재도 그곳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처럼 이명박 대통령의 생가도 두 곳으로 분리돼 있다.

포항시가 덕실마을을 관광지로 개발하면서 이 대통령이 살았던 적이 없던 4촌 형수의 집, 덕성리 561번지를 사실상 '생가'로 홍보하면서부터다.

포항시는 이 대통령 당선 직후부터 4촌 형수의 집 앞에 LED 전광판, 실크기의 철제 이명박, 관광안내소 및 안내판 등을 설치했다.
이명박 대통령의 생가는 이 대통령이 당선되기 전부터 풍수지리학자들의 관심의 대상이었다.
 
이 대통령의 형인 이상득 의원과 세일즈맨의 신화가 된 이 대통령까지 형제의 대성공을 분석하려는 이들이 많았기 때문.
 생가가 있던 곳인 흥해읍 덕성리 538번지에는 현재 이영두(72·여)씨 내외가 살고 있다.
1971년 이 터를 산 뒤 2005년 집을 지어 살고 있는 이씨는 이 대통령이 당선된 뒤인 2008년 2월부터 이곳을 생가터로 알리고 있다.
생가를 찾는 이들이 많아 농사를 짓던 주민 일부가 가건물을 설치해 상점 몇 곳을 열기도 했다.

김병구.권성훈.김태진기자

◆ 참고

쥐박이는 오사카에서 태어나서 4년간 살다가 한국으로 왔습니다.

현재 생가 자리엔 두부공장인지 뭔가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 지역 단체와 지자체에서 그 자리에 이명박 기념비를 세우는것을 추진중이라 합니다.

우리나라에선 언론에 막혀 이 사실이 제대로 보도되지 않고 있습니다.

 "생가"라 함은 태어난 집을 말 합니다.

 

참고 하시라고 하나 퍼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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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이 쓴 자서전(신화는 없다)과 ‘어머니에 실려있는 출생부분의 내용은 모두 8개 인데 모두가 허위다. 

 ’신화는 없다“와 ”어머니“에 실린 출생에 대한 설명은 아래와 같다.  

“우리 아버지 이름은 이충우, 3형제 중 막내였다.
할아버지의 땅뙈기는 두 형이 차지했고 아버지 혼자서 친구들과 함께 1935년에 총각으로 일본에 갔다.
자리 잡고 저축하여 한국에 나와 반야월 채씨 여인과 결혼을 하여 일본으로 건너가 6남매를 낳았다.
아버지는 전통적인 유교풍을 이어받은 양반타입이었다.
남자 돌림자는 ‘상’자, 여자 돌림자는 ‘귀’자인데 나 혼자만 돌림자를 이탈했다.
명박이라 지은 것은 어머니 태몽꿈에 크고 밝은 달이 치마폭으로 들어왔기 때문에 그렇게 지었다.”


이명박이 숨겨놓은 호적을 보면 진실은 아래와 같다.     
           

1. 이명박의 아버지 이름은 원래 떡쇠(德釗)였고, 32세였던 소화 14년에 이름을 충우로 바꾸었다.
이덕쇠는 1907년 생, 어머니는 1909년 생. 서기 1925년이 소화 1년. 

2. 할아버지 땅뙈기를 큰 아버지 두 사람이 나누어 갖고 아버지 혼자 일본으로 갔다는 말은 거짓이다.
할아버지의 땅뙈기는 무특-경특-덕쇠 3형제 중 경특이  혼자 차지했고, 무특과 덕쇠는 오사카에 건너가 나란히 이웃하여 대가족을 이루고, 창씨를 스키야마(月山)로 고쳐서 살았다.
이명박의 일본 이름은 '스키야마 아키히로'.

3. 아버지 덕쇠가 1935년에 총각으로 일본으로 건너갔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1935년에는 이미 3남매가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다.
1930년에는 귀선이, 1933년에는 상은이, 1935년에는 상득이 태어나 있었다.
그런데 어머니 채씨 여인과는 1931년에 혼인했다.
이명박이 지금에서야 밝히고 있는 덕쇠의 도일 연도는 1927년이다.  

4. 3형제 중 아버지 혼자만 일본에 갔고, 큰 아버지 둘은 조선에 남아 있었다는 말도 거짓이다.
2형제가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이웃하여 살았다.

5. 어머니의 본이 ‘반야월 채씨’라는 것도 거짓말이다. 그의 모친은 ’인천 채씨‘다.

6. 부친과 모친이 결혼하여 일본으로 건너가 6남매를 모두 낳았다는 말도 거짓말이다.
4째인 ‘귀애’는 1938년에 포항(영일군 의장읍 덕성동)에서 낳았다.
어머니가 귀국한 것이다.
어머니 채씨는 1938년에 귀국해 있었고, 그 후 이명박과 이말분은 일본에서 태어났다.
이 사실은 이명박과 그 아래 동생 ‘말분’을 일본에서 다른 여인이 낳았을 것이라는 세간의 의혹을 밝히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더구나 위 두 개의 책을 보면 이명박과 이말분은 어머니 채씨로부터 혹독한 서자 취급을 받았다.

7.  아버지가 전통적인 유교풍을 이어받은 양반타입이라는 말도 거짓이다.
일본 총독부가 양반-상놈-노비의 계급을 없애면서 양반가에만 유지돼 오던 호적을 하류계급에도 만들어 주었다.
그 이전에는 양반가에만 호적이 있었고, 그 호적에는 노비들의 이름도 있었다.
호적은 즉 양반가의 노비문서이기도 한 것이다.
호적에는 아무렇게나 불리던 노비들의 이름이 이런 식으로 기록돼 있었다. ‘
개똥이’는 ‘개동(介童)’이로, ‘이쁜이’는 이분(伊粉)으로, 떡쇠는 덕쇠(德釗)로 . . .
이명박 가문에게는 ‘덕쇠(德釗)’라는 이름이 싫었을 것이다.
아버지인 덕쇠는 32세(1938년)에 이름을 충우로 바꾸었고, 이 개명사실은 옛날 호적에 명백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이명박은 1974년 구-호적을 버리고, 새로운 호적으로 바꾸었으며, 새로운 호적에는 이 개명사실이 깨끗이 지워져 있다.
이충우는 태어날 때부터 이충우인 것으로 기록돼 있다. 소위 호적 세탁인 것이다.

이명박은 필자와의 법정 다툼에서 호적이 유실될 우려가 있어 1974년에 재-작성 하였다고 변명하지만 영일군에서 보관하는 호적이 수만 명에 이를 터인데 유독 이명박의 호적만 유실될 우려가 있다는 것도 우습다.
또한 똑같이 영일군에서 보관하는 호적인데 구호적은 유실우려가 있고, 신호적은 유실우려가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더욱 더 어이가 없다.
 또한 기록을 옮기려면 원래 것대로 옮겨야 한다.
가정법원 호적과에 가서 확인해 보니 개명사항은 필수 기록사항이라 한다.

8. 남자 돌림자는 ‘상’자, 여자 돌림자는 ‘귀’자인데 이명박은 자기 혼자만 돌림자를 이탈했다 변명한다.
이명박은 그의 자서전에서 자기 바로 아래 여동생의 이름을 ‘귀분’이라 기록했지만 호적에는 ‘말분’으로 분명하게 기록돼 있다.
명박이라는 이름은 일본에서 가장 흔한 이름이다.
이명박의 아래 동생의 이름이 ‘말분’이인지를 모르는 기자들은 이명박 한 사람만 돌림자를 이탈한 것으로 알고 왜 이명박 혼자서만 돌림자를 이탈했느냐고 물었다.
이에 대해 이명박은 한자의 뜻 그대로 “어머니 태몽꿈에 크고 밝은 달이 치마폭으로 들어왔기 때문에 그렇게 지었다.”고 변명했다.
그렇다면 어머니로부터 이명박과 함께 서자 취급을 받은 말분이는 어째서 돌림자를 이탈하였는지 다시 물어야 할 것이다.

                                                            결 론

이명박이 스스로 기록해 놓은 두 개의 책(신화는 없다, 어머니)의 출생부분은 총 8개의 요소로 구성돼 있는데 그 8개의 요소가 모두 거짓말이다.
이는 단순한 연도의 오해가 아니라 너무 황당한 거짓말이며 그 거짓말은 출생부분을 미화하고 이복형제라는 항간의 소문을 감추기 위해 기도한 의도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호적을 세탁한 사실은 가히 충격적이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호적을 세탁한 이유에 대한 변명이 유치하기 이를 데 없다는 사실이다.

2007년6월 지만원이 쓴 글 입니다.

 

 

-추신- 가끔씩 지가 만원짜리 밖에 안되는넘도 바른말 할때가 있습니다..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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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들은 알고 있다

- 청계 재산위원회 소동을 계기로 다시보는 이명박 재테크술 -

 

 될 성 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더니.

일찌감치 싹수가 글러먹은 자를 어쩌다가...

복덕방을 전전하며 부동산투기나 하고 다니면 딱 어울릴 자를

청와대에 들어앉혔으니 나라가 이모양, 이꼴~

 

1. 이명박은 '재산은닉의 귀재' ( 동아일보 )  

( 펌 )

 

 

 2.MB의 재산헌납, 의도적 사전기획인가 (월간 말)

월간 말 기자 아고라 글 (2009. 1. 28일) 펌


 ( 원문 : MB 재산헌납의 진실, 취재한 월간 『말』 기자입니다 )

http://bbs1.agora.media.daum.net/gaia/do/debate/read?bbsId=D003&articleId=2229653

 

MB가 ‘재산헌납’을 약속한지 1년이 지났지만, 공익재단을 만들 것이라는 등 ‘설’만 난무할 뿐 구체적으로 드러난 것은 없다. 재산헌납은 최악을 거듭하고 있는 MB의 신뢰도를 마지막으로 측정할 수 있는 카드, 하지만 시민들은 이마저도 신뢰하고 있지 않다. “재산헌납은 도대체 언제 하려고 하느냐”는 냉소만 난무할 뿐.


기자는 약 1년 전, MB 측에서 ‘재산헌납’을 오래전부터 기획했을지도 모른다는 심증을 느끼게 하는 증거를 찾을 수 있었다. 증거는 멀리 있지 않았다. MB의 신한국당 의원 시절, 6급 비서를 역임했다가 MB의 선거법 위반 및 피의자 도피 의혹을 폭로한 김유찬씨로부터 나온 증거였다. PLP를 기억하시는가? President Lee Plan, 즉 ‘이명박 대통령 만들기 선거기획단’이다. 김유찬은, 1996년 9월에 PLP 관련 문건을 당시 <주간조선> 소속이었던 홍석준 기자에게 건네준다. 홍석준 기자는 곧바로 ‘특종’을 때렸다. 그 기사는 지금도 조선닷컴 인터넷 페이지가 존재한다. (참고 [주간조선 단독입수] 이명박 대통령만들기 플랜)


이 기사에 공개된 문건에 따르면 MB는 다음과 같은 대권도전 일정을 꾸렸다.


1. MB를 97년 대선 후보로 지명받게 하는 데 목적이 있다.

2. 제 1의 목적이 여의치 않을 경우, 차선으로 가장 유력한 대권 후보를지원하여 98년 6월의 지방자치 선거에서 서울시장 후보권을 획득하는 데 둔다.

3. 제2의 목적은 곧 2002년 서울시장 임기 직후 있게 될 대통령선거에서 가장 유력한 후보로 도약하기 위함이다.


시차만 5년의 차이가 있을 뿐, MB는 이 일정 그대로 대권에 도전해 대통령에 당선됐다. 그렇기 때문에 이 PLP 문건은 나름의 현실감을 갖는다. PLP가 제시한 MB의 약점은 재산문제, 그렇다면 PLP는 어떤 돌파구를 제시했을까?


"이 의원의 재산문제를 능동적으로 돌파하기 위해 재산의 사회 환원을 검토하고, 인간적 포용력을 보여주는 문제를 검토하자."


실제로 MB는 정계에 진출했을 때부터 재산문제로 인해 자주 구설수에 올랐다. 공직자 재산공개 당시 도곡동 땅을 은닉했다는 의혹이 제기됐으며, 소유 토지를 공시지가보다 턱없이 낮게 신고했다는 의혹이 제기돼 현대그룹 측에서도 “이 의원의 재산이 그것밖에 안되겠느냐”는 반응을 보였을 정도. 재미있는 것은 그때마다 MB는 재산을 헌납하며 위기에서 벗어났다는 것.


김유찬씨는 PLP를 주도한 이로 ‘대운하 전도사’ 추부길씨를 꼽았다. 추부길씨가 주도하다가 MB의 처남 김재정씨와 갈등을 빚어 이탈하면서 PLP도 와해됐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MB가 대통령에 당선된 과정이나 재산헌납을 전국민적으로 약속하는 등, PLP가 정말 와해된 것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제기될 수 밖에 없다. 기자는 추부길씨와 어렵게 전화연락에 성공할 수 있었지만 그는 “나는 지금 언론 인터뷰를 할 상황이 아니"라며 해명을 거부했다. 추부길씨가 주도했던 PLP, 과연 재산헌납은 '의도적 사전기획'이었던 것일까.


봉인된 금서 <이명박 리포트>를 열어젖히다


김유찬씨는 자신의 책 <이명박 리포트>에서 ‘이명박=지독한 구두쇠’라는 주장을 펼쳤다.


"어느 때인가 기획단 회의에서 이명박 씨의 재산형성과정에 대한 국민적 의혹을 거론한 적이 있었다.

'의원님! 재산의 절반 정도는 사회로 환원하겠다는 기자회견을 하시죠!'

대통령이 되려고 꿈꾸는 그에게 어느 한 선거기획참모가 정식으로 과감하게 건의했다. 그러나 이 건의에 대해 이명박 씨는 옆에 있던 재떨이를 집어 던진 것으로 일단락되고 말았다." -<이명박 리포트> 350쪽


"하루는 적십자로부터 물난리 수해 때문에 '적십자회비'를 내라는 전갈을 받았다. 주무부장이 이명박 의원에게 보고했다. 보고를 받는 자리에서 주무부장은 중진의원으로서의 무게도 있고 하니 통지받은 적십자비보다는 좀 더 후하게 납부하는 것이 어떻겠는가를 건의했다.

주무부장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이명박 의원으로부터 재떨이가 날라들었다.

'야! 그게 니 돈이냐?'라고 소리지르며……. -<이명박 리포트> 62쪽


이외에도 7년간 모신 운전기사가 전세금 200만원이 부족해서 이명박 의원에게 '돈을 빌려줄 것'을 요구했다가 해고됐다는 주장도 있었다. 그리고 국회의원 선거를 치루면서 지구당 운영자금이 부족해 조직부장이 자신의 전셋집을 헐어 자금을 보탰다가 선거 후 정산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들리자 이명박 의원은 다음과 같이 말하며 화를 냈다고 한다.


"그 새끼 짤라 버려!"


이 증언들은 과연 사실일까. MB는 정말로 재산헌납을 실천할 수 있을까.


‘소재 불투명’ 김유찬, 김유찬은 어디에 있나


기자는 김유찬씨의 증언을 듣기 위해 그가 수감된 교도소를 어렵게 찾아 면회를 신청했다. 하지만, 면회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가석방됐기 때문이다. 2008년 9월 대법원에 의해 징역 1년 2개월이 확정된 김유찬씨, 하지만 그가 가석방된 시점은 불과 한 달 뒤인 10월이다. 소재지 수배 노력은 물거품이 됐다. 독한 수단을 쓴다면 찾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취재과정에서 불법이 개입돼선 안된다. 사실 이 글을 올리는 이유는 현재 ‘소재 불투명’ 상황인 김유찬씨를 찾기 위한 것, 여론과 언론이 움직인다면 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김유찬씨는 <이명박 리포트>에서 은연중에 그런 불안감을 노출시킨 적이 있다. 지인으로부터 전해들었다면서, 이명박 의원이 자신을 겨냥해 내뱉었다는 욕설을 서술했다.


"그 새끼 목에 돌 매달아서 인천앞바다에 던져버려!"


듣기만 해도 끔찍한 이 욕설, 과연 사실일까. 이 욕설과 소재 불투명……. 김유찬씨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기자는, 부디 기사에 쓴 '소재 불투명'이란 표현이 어긋나기만 바랄 뿐이다.

재산헌납, MB의 대국민 해명을 요구한다


기자가 PLP의 내용을 월간 말 2월호에 보도하고 아고라에서 이렇듯 관련 글을 쓰면서 '재산헌납'에 대한 의혹을 제기하기로 결심하기까지, 많은 고민이 뒤따랐다. 기자도 사람이기 때문에 무서웠다. 미네르바 구속을 지켜보면서 느낀 공포감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것이다. 게다가 촛불시위 당시 기자는 경찰이 시민들을 폭력적으로 진압하는 모습을 취재과정에서 생생하게 지켜봐왔다. 대운하 음모를 폭로한 김이태 박사가 당한 징계도 잘 알고 있다.


기자에게는 부모님 두 분과 어린 동생이 있다. 장래를 약속한 여자친구도 있다. 하지만 이명박 대통령의 세상은 공안정부이며, 정권에 반대하거나 바른 말을 하면 어떤 처지로 전락할지 알 수 없는 세상이다. 불안할 수 밖에 없었다. 게다가, 기자 혼자만 다치는 것이 아니다. 월간 『말』의 구성원 모두가 위험해질 수도 있다.


무서웠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자는 언론인의 사명을 지키기로 했다. 촛불시위 당시 위험을 무릅쓰고 거리로 뛰쳐나온 시민의 힘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언론인의 사명을 지킨다면, 그들이 기자를 지켜줄 것이라고 판단했다. 모든 것을 걸고 진실을 위해 싸우기로 한 이상, 그들을 믿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촛불을 든 그 힘에 호소하고자 한다.


이명박 대통령의 재산헌납이 진실인지의 여부를 가장 확실하게 밝힐 수 있는 힘은 국민에게 나온다고 생각한다. 만약, 기자의 문제제기 그대로 '의도적 사전기획'이라면 이명박 대통령은 전국민을 향해 거짓말을 한 것이다.


본심이 아닌 것을 정략적으로 이용했으니 거짓말일 수 밖에 없다. 정치인, 특히나 최고권력자의 거짓말은 그야말로 나쁜 버릇이다. 기자는 이명박 대통령의 '재산헌납' 선언이 거짓이 아니기만 바라고 있다. 하지만 그 바람과 취재내용은 사뭇 달랐다. 국민의 힘에 호소할 수 밖에 없었다.


이명박 대통령과 청와대는 답하라. PLP의 내용은 사실인가, 그리고 재산헌납은 '의도적 사전기획'인가. 다양한 불법비리 의혹과 경제위기, 그리고 방송장악 의혹과 용산참사 등 신뢰도가 최악을 거듭 갱신하고 있는 이명박 대통령으로서는, 재산헌납 선언이야말로 본인과 정권의 신뢰도를 마지막으로 검증받을 수 있는 기회라고 판단한다. 국민은 눈을 감고 있지 않다. 단 한 번이라도 진실된 모습을 보여주길 바란다.


-추신


기자에게 정권의 위해가 가해진다면, 기자는 ‘원본기사 작성자’인 당시 <주간조선> 홍석준 기자(동명이인일지도 모르지만 ‘조선일보 홍석준’은 최근 스포츠부장으로 발령, 동명이인일 경우엔 이후 정중한 사과를 남기겠다)만큼은 반드시 같이 껴안고 갈 생각이다. ‘원본’ 작성자로서의 책임을 져야 한다는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