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일본정부는 독도 문제를 국제사법재판소에 단독으로 제소할 뜻을 내비쳤습니다. 이는 일본정부가 승산이 있다는 판단을 내린 것으로 보여 우리로서도 신경이 쓰이는 것은 솔직한 현실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독도를 실효적으로 지배하고 있음에도 근대 이후 자료관리 측면에서 아쉬운 점이 없지 않기 때문입니다. 영토분쟁의 경우 '실효적 지배'보다는 근거자료를 토대로 한 법률적 입증문제가 더 호소력을 갖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소설가 강준식 씨는 최근 <독도의 진실>을 펴냈는데요, 이 책에는 대한제국이 '칙령 제41호'(관보 제1716호, 1900년 10월 27일자)를 통해 울릉도 군수가 울릉도와 죽도(竹島), 석도(石島)를 관할토록 한 사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1905년 일본의 '독도 '편입' 이전에 대한제국이 '독도'를 실효적 지배를 하고 있었다는 결정적인 증거랄 수 있습니다. 강 씨는 최근 박도 씨가 펴낸 <개화기와 대한제국>(눈빛 펴냄)에 '1905년의 독도'라는 글을 특별기고 형식으로 실었습니다. 필자와 출판사의 양해를 얻어 글 전문을 소개합니다... 편집자)
 | 하늘에서 바라본 독도 전경 |
독도와 국제사법재판소
2012년 8월 10일 이명박 대통령의 방문을 계기로 독도 문제는 다시 격랑 속으로 들어갔다. 일본 측은 이 문제를 국제사법재판소에 회부하자고 제안했고 한국 정부는 이를 거절했다. 만일 저들의 제안대로 국제사법재판소에 갔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유감이지만 우리가 이길 확률은 높지 않다. 그 이유의 일부는 국제사법재판소의 판사 15명 중 1명이 일본인이고 재판장이 일본인이며 국제사법재판소의 운영비 일부를 일본이 담당해 왔다는 측면도 있지만, 그에 앞서 한국이 갖고 있는 역사적 권원(title)도 양질(良質)의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그런데 일본 총리는 8월 24일 기자회견을 갖고 “다케시마(독도)가 역사적·국제법적으로 일본의 영토인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어민들은 에도 시대 초기에 막부(幕府)의 면허를 받아 다케시마를 이용했고, 적어도 17세기 중반에는 영유권을 확립했다. 1905년에는 내각회의 결정으로 시마네 현에 편입해서 영유 의지를 재확인했다”라며 자신들의 역사적 권원을 제시했다. 막부의 면허나 17세기 중반의 영유권 확립 주장은 아주 조잡한 것에 바탕을 둔 것이라 무시해도 좋지만, 1905년 독도를 시마네 현에 편입했던 내각회의 결정만큼은 우리 쪽에서도 경각심을 갖고 대처해야 할 대목이다. 한국 언론들은 1905년의 독도 편입은 강탈이므로 말도 안 된다는 반응이지만 실은 일본이 가장 자신 있어 하는 대목이 바로 1905년의 '독도 편입'이다. 그 까닭은 이렇다. 일본이 독도를 시마네 현에 편입한 것은 1905년 2월이고, 대한제국의 주권이 빼앗긴 을사늑약은 1905년 11월로 두 사건 사이에는 약 9개월간의 시차가 있는데, 이 기간 동안 대한제국이 아무런 항의도 하지 않았던 점을 저들은 약점으로 잡고 있는 것이다.
물론 내부적으로는 일본이 1904년 한일협약을 강요하고 대한제국 각 부에 일본 고문을 두어 정책을 조정했기 때문이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우리의 내부 사정이고 적어도 대외적으로는 외교권이 남아 있는 9개월 동안 대한제국이 아무 항의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미국을 위시한 열강은 1905년 일본의 독도 편입을 합법적인 것으로 간주해 온 경향이 있다는 점이다. 1951년 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 때 독도가 미확정 지역으로 한국 땅에서 빠지게 되는 이유의 하나도 바로 거기 있다. 한국 측이 잘못 알고 있는 점 그런데 한국의 일부 언론이나 일부 학자들은 사실을 잘못 알고 있는 측면이 있다. 그래서 독도 문제만 나오면 자꾸 옛날 지도 같은 것을 들추는 경향이 있는데 국제재판에서 지도는 참고자료일 뿐 결정적인 증거가 되지 못한다는 점이다.
쉽게 말해 지도는 지도를 만든 제작자의 견해일 뿐이다. 영유권 문제와 관련하여 국제법적인 증거효력을 갖는 것은 지도가 아니라 한국이 독도에 주권을 행사했던 기록이나 증거물이다. 또 우리 쪽의 자료가 불충분하니까 일부 학자들은 17세기 일본 막부가 내린 도해(渡海)금지령이나19세기 메이지 정부의 소위 태정관(太政官) 지령 같은 것을 증거로 내세우기도 하나, 중요한 점은17세기나 19세기의 기록이 아니고 1905년 일본의 독도 편입을 국제사회가 합법적인 주권행사였다고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는 점이다.
 | 1946년 맥아더 사령부 지령 제677호에 첨부된 지도. |
독도가 우리 영토로 확고히 된 것은 이승만 대통령 때부터다. 1952년 '맥아더라인'을 대신한 '평화선'을 그가 선포함으로써 우리가 독도를 실효 지배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독도의 갑옷인 평화선을 벗긴 것은 경제개발에 일본 돈이 필요했던 박정희 대통령 때다.
이후 김영삼 대통령이 독도의 영유권문제와 어업문제를 분리하는 실수를 저질렀고, 그 연장선상에서 김대중 대통령이 신어업협정을 체결함으로써 한일 간의 독도 영유권 지위는 현재 1대1의 입장이 되었다는 해석도 있다. 그래서 일본 탐사선이 독도에 출현하려고 했을 때 노무현 대통령은 이를 당파(撞破)하라고 지시했는데, 당시 미국 측의 반응은 일본은 국제법의 테두리 안에서 행동하는데 한국은 분별없이 행동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는 사실상 미국이 일본을 편들었다는 반증이다. 또 이명박 대통령이 독도를 방문하자 미국 측은 한국이 실효지배하고 있음에도 한일 양국이 평화롭게 해결하기 바란다는 반응을 보였는데, 이 또한 사실상 미국이 일본을 편들었다는 반증이다.
독도의 해법 그래서 군사적 대응을 해보자는 의견도 있다. 그러나 동해상에서 일본의 해군력은 한국의 4배다. 일본의 최종 시나리오는 한국이 6·25전쟁 같은 환란을 당할 때 독도를 무력 점령하는 것이다. 그런 뒤 유엔 안보리가 개입하면 독도 문제를 국제사법재판소에 가져간다는 전략이다. 이렇게 독도가 위기에 처할 때 한국을 도와줄 나라는 현재 한 나라도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독도를 적극 홍보하자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일본은 지난 60년간 5천여 종의 책자를 각 국어로 발간해 왔고, 해양자료를 각국에 제공해 왔다. 우리가 한 두 번의 이벤트로 만회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따라서 해법은 국제사회가 합법적인 것이었다고 간주하는 경향이 있는 1905년 일본의 독도 편입 논리를 분쇄할 수 있는 증거를 우리 쪽에서 내놓는 것이다.
 | 울릉도 군수가 울릉도와 죽도(竹島), 석도(石島)를 관할토록 한 '칙령 제41호'가 실린 <관보> 제1716호(1900.10.27) |
다행히 우리에겐 비장의 카드가 하나 있다. 1900년 대한제국이 반포한 ‘칙령 제41호’가 바로 그것이다. 여기에 “울도군의 관할지역은 울릉도, 석도, 죽도”라는 문구가 명기되어 있는데, 이중 ‘석도(石島)’가 독도라는 것을 입증하면 된다. 이 점을 입증하면 국제법적인 증거가 된다고 미 국무성이나 일본 사학계도 인정하고 있다. 나는 『독도의 진실』이란 저서에서 ‘독도’의 명칭을 처음 문자화시킨 것이 일본이었다는 사실을 밝혀냄으로써 칙령 제41호의 '석도'가 '독도'라는 것을 입증했다. 이로써 독도는 대한제국이 1905년 이전에 실효지배하고 있었던 사실이 입증된 것이고, 일본의 독도 편입은 불법적이었던 것이 판명된 것이다. 이에 따라 일본의 논리에 기초했던 미국은 더 이상 일본을 편들 수 없고, 미국의 도움을 기대하며 국제사법재판소에 가려고 해마다 문제를 제기해 온 일본도 그 동력을 잃게 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