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이 퍼지기를 기다려 사무실을 나선다.
새벽 출근길 영하12도에서 오른 기온이 아직도 영하7도 라고 하지만
두툼한 파카를 입고 선산을 들러 "의사고박흥주대령"묘소를 향하여,
동동주 한 병과 북어포 하나지만 격식을 갖추기보다는 찾아뵙는다는
마음하나로 이동교리 공동묘지에 올라 잔 을 올리고 축원을 올린다.
'지역시민사회단체인 "포천깨시민연대" 2기(23~24년) 대표의 직 을
받았습니다. 칠순을 바라보는 지금 아둔하고 걸음마저 더딘 제가
이 막중한 일 을 감당할수 있을지 많이 두렵고 걱정되오나
맏겨진 소임에 정성을 다해 보려 합니다.
혼자서는 할수없는 10.26혁명의 가치와 순국하신 여섯 의사님들에
신원과 명예회복, 그리고 고김재규장군의 유언이신 한 자리에
여섯님을 모실수있게 노력하고자 하오니 지켜봐 주시옵고
저희 "포천깨시민연대"가 지치거나 멈춰서지 않도록 채근하시고
난관을 극복할수있는 지혜와 용기를 주시기를 업드려 빕니다.'
참배를 마치고 신북면 가채리 산47번지 한국전쟁 민간인학살지를 찾아 나선다.
40여년 전 지역 어른께서 일러주셔서 지인과 한번 올라 본 학살지!
오르는 들머리는 철조망으로 막아놓아 산 비탈을 기어돌아 우회하여
사십수년전 보았던 기억을 더듬어 올라본 지형은 기억속의 잔영과는
너무많이 틀리고 산의 경사가 가팔라 이곳이 맞는지 의문이 든다.
등성이 두어봉을 올라 살펴보니 약수터 위로 약 삼사백평 정도되는 곳
조림한 듯한 잣나무가 빽빽히 들어선 곳이 경사도가 낮고 거의 평지를
이루는 곳, 이곳이 약수터로부터 그리 멀지 않았던 기억속에 학살지가 아닐까
나무그늘을 비켜선 햇볕이 드는 눈 밭에 들고온 동동주 두병을 종이컵에
나눠 부으니 열두잔이 된다.
'님들께서 예 묻히셨단 전언에 올라본 예전 그자리와 지금에 자리는
차이가 많습니다. 옛말에 "십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그 말씀이
이리도 제게 다가올줄은 몰랐습니다. 지난 사십수년을 사는게 바쁘고
혼자서라도 찾아뵙기에는 두려움과 함께 아무것도 할수없는
죄스러움에 애써 잊으려하며 살아온 지금에서야,
저 마저 잊으면 님들께서 영원히 잊혀지실것 같아 이렇게 찾아 뵙습니다.
학살을 당해야 할 아무런 이유도 모른채 정권과 권력에 의해 이 외진곳에
73년 이란 세월동안 풀뿌리 나무뿌리에 감겨 계신 님들께 정성없이
탁배기 잔 을 올리는 것은 저와 함께할 동지 "포천깨시민연대"가 있기에
용기가 생기고 님 들을 찾을수 있겠다는 실낱같지만 희망이 보이기에
우선 말씀을 올리고자 왔습니다.
다시찾아 뵈올적에는 동지들과 함께 예 를 갖추어 뵈옵고자 하오며
저희 "포천깨시민연대"가 민중과 함께 같이 갈수있도록 길 을 열어
주시옵기를 업드려 빕니다.'
약수터 위에 설치된 기념비 입니다.
역사에서 지워버리려는 학살지 들머리에 새겨넣은 저 글 귀!
국군전사자를 잊지않고 찾겠노라는 의지와 뜻 에
반대를 하는것은 아니지만, 학살지앞에 세운 기념비에는
군.경에 의해 민간인이 떼죽음을 당한 사실을 모를리 없건만
희생자에 대한 문구는 한 글자도 아니보이는 것이 현실이란
생각에 분노와 함께 슬픔을 감출수가 없습니다.
국가에 의해 아무 죄 없는 민간인이 학살을 당하고도 73년이란
시간동안 희생자는 억울하고 참담한 사실을 흙 속에 묻어두고
가족들은 찾을 생각도 못한채 가슴에만 담아두고 있다가
기억 하는이 마저 하나 둘 흙으로 돌아가고 있습니다.